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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순신 장군미 Best of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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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나정 2023. 9. 1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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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한국 사람들의 제1의 영웅이자 바다의 신으로 불리고 있고 불패의 해군 장군 세계 4대 해전 대장군 이자 세계해군 제독 중에서 넘버원인 장군 서울 광화문 거리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릴 내용은 이순신 장군님에 여러 해전 중에 Best of best 뽑아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옥포해전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 척해진)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경상도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룬 전승 신화의 첫 승전이며 전쟁 발발 후 조선군 및 조선 수군의 첫 번째 승리라는 점



2. 사천해전 ( 거북선이 처음 사용된 해전이며 이순신 장군님 어깨 상처를 입은 전투)

사천 해전(泗川海戰)은 1592년 음력 5월 29일 사천에서 일어난 해전이다. 이때 일본 수군 13척이 전멸되었고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1592년 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함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에서 출발하여 노량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일본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하였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 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돌려 반격으로 나섰으며 거북선 돌격시켜 일본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뒤를 따랐다. 결과는 적 함대 13척 모두 격침.
또한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전투를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 일본 수군은 패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 왕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 장군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3. 한산도대첩(세계 4대 해전 중 하나)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혹은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은 1592년 8월 14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이순신 장군님의 함대는 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선 육지(육군)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쿠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음력 7월 5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음력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는 애초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 손에서 일본의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을 생각하였다 그 결과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가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6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 위장 권준이 층루 대선 1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했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싸움을 북돋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 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어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큰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 파 왜 병장》에는 400명, 《와키자카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미역을 먹으며 견내량과 무인도에서 머무르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4. 명량해전 ( 이순신 장군님의 기적 승리 )

명량 해전은 1597년(양력 10월 26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함선 330여 척을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퇴했던 해전이다.


칠천량 패전의 손실이 커서 조선 선조 왕은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 폐지 불가론을 펼쳤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 어록) ”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5. 노량해전 (조일 전쟁 마지막 해전 이순신 장군님 순국)


노량 해전(露梁海戰)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2월 16일이 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 수군이 경상우도 남해 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이다.

이순신 장군님은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사망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1598년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6천명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보충병 진인과 함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이순신 장군님은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